Nairrti 님이 작성하셨던 포스팅의 아카이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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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잠깐 나와서 사람들이 "우와 파판 온라인이야"라고 관심을 받다가 급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게임이다. 그런데 그 게임을 2012년에 닫고 1년 동안 갈고 닦아서 새로 오픈한 것이 이 '되살아난 왕국(A Realm Reborn)' 버전. 국내에도 온라인 게임이 상업적으로 실패하고 리뉴얼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파판14의 경우 들인 돈이 워낙 많아서 포기 못하겠다 싶었는지 아니면 파판 시리즈에 오명을 남길 수 없다는 생각이었는지 리뉴얼을 했다. (참고: 서비스 종료와 리뉴얼을 잇는 무비) 사실 이전 버전은 일본어로만 서비스를 했고, 한국에서 접속하는데 여러 제약이 있어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으니, 현재 버전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걸로 하겠다.
게임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시나리오 퀘스트(메인 퀘스트)의 진행에 따라서 게임 요소가 열리도록 되어 있어서 20레벨 퀘스트에 말(초코보)을 탈 수 있도록 되어 있기는 하지만, 플레이어가 20레벨이 되면 모두 짠~하고 말을 타는 것도 아니다. 20레벨이 되어 기능은 열렸어도, 말을 타기까지는 또 점수를 모아야 하는 등 엉성하다.
뭐 저건 아주 간단한 예일 뿐이고, 퀘스트의 설정이나 레벨 진행, 지역 설계 등 전체적으로 '전혀 정교함이 없다'. 최근 MMORPG의 흐름이라면 플레이어들이 어느 지역에서 몇 마리의 몹을 잡고 어떤 퀘스트를 해서 몇 레벨이 되고, 이 지역 퀘스트를 다 하면 다른 지역으로 가는 퀘스트를 주고 하는 식의 짜여진 플레이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 것인데, 파판14에는 그게 없다. 그냥 메인 퀘스트 따위 버려두고 레벨업하는 재미에 빠지면 평생 가도 말을 탈 수 없을 뿐 아니라 클래스 변경 같은 것도 할 수 없다. 심지어 클래스 퀘스트를 해야 얻을 수 있는 기술도 있다. 그런데 이 메인 퀘스트의 내용이 재미있느냐 하면, 별로 그렇지 않고 이게 무슨 유치한 이야기인지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게다가 뻣뻣한 NPC들의 '연기'까지 너무 어설프다.
게다가 각 시작 마을은 클래스에 따라서 달라진다. 탱커(Marauder)+소환사(Arcanist) 마을, 탱커(Gladiator)+딜러(Pugilist)+딜러(Thaumaturge) 마을, 딜러(Lancer)+딜러(Arher)+힐러(Conjurer) 마을. 그래서 나중에라도 '크로스클래스(여러 클래스를 배워서 일부 기술을 다른 클래스에서 빌려 쓸 수 있음)'를 하려면, 다른 마을에 있는 클래스 길드로 뛰어가 배워야 한다. 10레벨 퀘스트를 하면 크로스클래스가 열리는데, 15레벨이 되어야 다른 마을을 방문하는 퀘스트를 준다. 월드 설정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다. 전사 마을, 힐러 마을 같은 설정이라니.
게임 플레이 부분은 갈수록 더 가관이다. 소위 '글로벌 쿨타임'이라는 것은 2.5초로 설정되어 있다. WOW의 경우 1.5초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 긴 시간인데, 이렇게 설정된 이유는 캐릭터들의 애니메이션이 미친듯이 쓸데없이 길기 때문으로 보인다. 덕분에 탱커 플레이는 짜증이 폭발하는데, 어그로(enmity)를 당기는 기술은 연계기로 발동한다. 그냥 때리면 10데미지 연계로 때리면 20데미지가 나오는데, 어그로 = (데미지 * X)라는 걸 생각하면, 그냥 때리고 2.5초 후에 쎄게 도발할라냐 2.5초 마다 반 데미지씩 도발할라냐 선택이 된다. 광역도발에 이르러서는 이제 화가 난다, 발동 준비 동작이 1초다, 어그로가 튀었는데 광역 도발을 걸랬더니 힐러가 몹을 달고 거리 밖으로 나가버린다.
클래스들의 기술은 그냥 123-124-123-124를 반복한다. 탱커의 경우라면 12-12고, 딜러의 경우도 12-12면 다행, 측면이나 후면에 서서 1111하고 있으면 된다, 2.5초 마다. 이런 단조로운 기술 사용을 설계한 이유야 당연히 PS3와 PC를 동시에 지원한다는 이유 때문이겠지만, 이 게임을 PS3 혹은 패드로 한다면 글쎄다, 파티 플레이가 되기는 하나? 바닥에 광역 공격 표시 보고 피하는 것도 쉽지 않을텐데.
지역 디자인은, 앞에 잠깐 말한 것처럼 동선 같은 것은 관심도 없었고, 갈 수 있는 곳과 못가는 곳을 명확하게 구분해 두었다. 웬만한 곳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금지지만, 떨어져 죽을 것 같은 곳은 다 안되느냐 하면, 이게 어디서는 되고 어디서는 안된다. 플레이어로써는 이게 구분이 안되니 '여기서 저기로 뛰어 넘으면(내리면) 쉽게 가는데' 생각하고 뛰어보는 경우가 너무 많다. 남들 이러는 거 보라고 코메디로 만들어 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만.
퀘스트 부분을 보자면, 앞에 이야기한 것 처럼 메인퀘스트만 하고 주변 퀘스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면 모를까, 일반적인 MMORPG의 경험대로 주는 퀘스트를 다 받아 하면서 레벨업을 했다면 20렙 메인 퀘스트를 25렙에 하게 되는 꼴이 발생한다. 이 갭은 초반에도 1~2레벨씩 벌어지다가 일찍 깨닫지 않으면 30렙에 26렙 퀘스트를 하고 있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덕분에 26렙에 주는 퀘스트 보상이라는 건 그냥 잡템 만큼의 가치가 되고 만다. 퀘스트라는게 뭔지, 생각 좀 했어야 했다.
'숙명(fate)'라고 부르는 필드 퀘스트는 균열(Rift)이나 길드워(Guild Wars 2) 같은 게임들과 비슷하다. 몹들이 잔뜩 나타나 마을을 공격하려 한다거나 그냥 잔뜩 생긴다거나 물건을 줏어 모아서 갖다 달라거나 하는 식을 보면 최근 길드워2의 것을 벤치마크했구나 싶기도 한데, 기왕 벤치마크를 할 것이면 퀘스트라든지 설정이라든지 하는 부분도 좀 신경을 쓰지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아이템 제작은, 이 게임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만들었구나 결론을 내게 된다. 생산직 클래스가 생산할 수 있는 아이템은 '모두' 상점에서 판매한다. 생산직을 선택해서 돈을 벌어보겠다 생각을 하려면 꿈일 뿐이고, 그나마 가끔 나오는 높은 등급(high quality) 아이템은 제작자 레벨 20이나 되어야 10렙에 쓸 수 있는 고퀄 아이템이 나오니, 내가 만들어 쓸 수는 없고, 그나마도 원자재부터 고퀄을 끌어모아야 겨우 하나 건질 수 있는 수준이라 확률이 너무 낮다. '제작 시스템' 자체는 뱅가드(Vanguard)와 유사하고 지루하지 않게 잘 만들었지만, 게임 기본적으로 '경제'에 개념이 없으니 이걸 어쩌랴.
그냥 시작부터 끝까지, MMORPG라는 걸 만들어본 적이 없는 (심지어 별로 플레이해본 적도 없어 보이는) 개발자를 데려다가 만든 게임으로 보인다. PS3와 PC 양 쪽을 모두 잡겠다는 생각과 전세계 서비스에 맞춰 4개 언어 자동 번역까지 탑재했지만, 기본적인 게임 구조에서 MMORPG라는 장르가 오랜 시간동안 검증하고 확립한 상식들을 싹 무시하고 자신만의 세계관에 자신만의 게임 방식으로 만들어 두었다.
최근 소식에 따르면, 백만 카피가 판매되었다고 하고 덕분에 모든 서버 신규 캐릭 생성을 잠궜는데 (서버도 설계를 잘못해 개판인데다가) 이게 요즘 전세계적으로 할 MMORPG가 없어서 그런 덕분이지, 파이날판타지 온라인이라는 이름을 빼면 이 게임이 과연 몇 달이나 유지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스퀘어가 각종 플랫폼으로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것이야 굉장히 긍정적이지만, 해당 플랫폼이나 장르를 연구 좀 했으면 좋겠다.
이런 왕국 따위 되살리지 말았어야 했다.
뭐, 예의상으로 칭찬을 한 마디 덧붙이자면, 아트 디테일은 꼼꼼하게 잘 되어 있다. 게임 설계와 안 맞아서 그렇지. 아... 이렇게 되면 칭찬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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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블로그에 리뷰를 했더니 GDF에도 올려달라고 하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