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W가 잃어버린 MMO의 정체성
블로그 링크: https://zerasion.postype.com/post/2302506
틀래식하면서 모두가 느꼈던 "아! 우리가 뭔가 잊고 있었구나!"에 대한 깨달음을 정리해봤습니다.
----
요즘 개인적인 게이머로서의 목표를 위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격전의 아제로스(이하 리테일)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클래식(이하 틀래식)을 번갈아가며 플레이하고 있다. 처음엔 너무 다른 두 게임 사이에서 적응이 어려웠는데, 점차 시간이 지나다보니 "아, 이 두 게임은 사실 전혀 다른 장르의 게임이라고 이해해야 하는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 끝에서 내린 또다른 인사이트를 다른 분들과 공유해보고자 한다.
클래식 서버의 등장
틀래식이 처음 업데이트 됐을 때, 인고의 대기열의 뚫고 들어가 각 종족 별 시작 마을에서 비선공 야생 동물 몬스터 하나 제대로 공격해보기도 어려운 어마어마한 인파를 마주했을 때 적잖은 문화 충격을 받았다. 오리지널 와우를 그리워하는 숨은 와라버지들.. 아니 와석들이 이렇게 많았구나라는 놀라움과 함께, 이게 거품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과연 얼마나 이 인기와 관심이 유지될까.하는 궁금증이 동시에 밀려왔다.
모든 건 추억 보정에 의한 미화이며, 사실 실제로 클래식 서버가 업데이트 되면 모두들 그 불편함에 경악하게 될 거란 주변의 많은 예측들이 있었지만, 실제로 플레이하면서 느낀 건 "그 동안 우리가 잊고 있던 무언가가 분명히 있었다"라는 어렴풋하지만 확실히 느껴지는 깨달음이었다.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GDF의 다른 글에서 다루고 있으니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을 부탁 드린다.
[GDF] 와우 클래식의 지리적 특징과 MMO의 본질
[GDF] 저니, 오버워치, 틀래식의 플레이어 관계에 대한 단상
틀래식 주요 특징
리테일과 다른 틀래식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1. 느린 게임 템포
일단 틀래식은 게임 전체의 진행 속도가 리테일에 비해 판이하게 느리다.
이는 게임 전체의 볼륨이 십수년 간 쌓여 후발 주자가 따라잡을 수 있게 지속적으로 소비 속도를 줄여온 리테일과 달리 최초 와우라는 게임이 출시될 당시의 기준으로 최고 레벨까지 도달하는 시간을 억제하기 위해 의도된 페이스다.
심지어 부분유료화 방식도 아닌 월정액제의 수익 구조이기 때문에, 더욱 의도적으로 게임 템포를 길게 잡아 늘이는 방식으로 디자인됐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이동과 전투에 걸리는 시간이 대단히 긴 편인데, 이동은 당장 초고속 3차원 이동 수단인 "나는 탈 것"이 없으며 백골마, 천골마로 불리는 느린 탈 것과 빠른 탈 것조차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40레벨과 60레벨이 되어야 습득할 수 있다. 그 전까지는 무조건 두 다리로 직접 달려서 이동해야 한다. 심지어 각 거점을 빠르게 운송해주는 그리핀/와이번 비행 조련사 위치도 매우 제한적이다.
전투 템포 역시 마찬가지. 각 전투에 소요되는 시간 하나하나가 긴 편인데, 한 번에 상대할 수 있는 적 개체 수까지도 1~2 마리로 적다. 만렙이 아닌 성장기에 보기 드문 아주 튼튼한 탱커가 아니라면 동 레벨 몬스터 3마리를 상대하는 건 일반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일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예외니 넘어가도록 하자)
그리고 전투 내부적으로도 각 액션들 사이의 텀(쿨다운이나 캐스팅, 또는 기본 공격 인터벌)이 굉장히 길다.
게다가 심지어 전투와 전투 사이에 반드시 회복의 과정이 필요하다. 리테일에선 힐러들의 마나 회복 타임 정도만 있으면 그 외 탱커/딜러들은 별도의 다운타임(Downtime. 게임 중간에 플레이어가 쉴 수 있는 휴식 시간이라는 의미로 와우의 아버지인 마크 컨Mark Kern이 자주 사용)이 필수 요소는 아니다. 하지만 틀래식에선 대부분의 직업이 음식을 먹으며 중간 중간 체력 회복 시간을 가져야 하며, 마나를 사용하는 직업이라면 마나 회복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캐릭터가 앉아서 음식을 먹는 10~20초 간, 플레이어는 캐릭터를 이동하지 않고 유지시켜야 하므로 인터페이스를 살펴보며 캐릭터를 정비하거나, 지역 채팅으로 다른 플레이어들과 수다를 떨게 된다.
2. 강도 높은 MMO성
풀어서 이야기하면, "서로가 서로를 강하게 필요로 하도록 디자인"되었다는 의미다.
대표적으로 각 지역마다 반드시 정예 등급의 퀘스트가 존재하며, 정예 퀘스트를 진행하려면 솔로잉으로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초과 레벨링을 한 다음 진행하거나 통상적으로는 동 레벨 대 다른 플레이어들을 모아 파티 플레이로 진행한다. 대체로 후자의 비중이 더 높은 편이며, 이 쪽이 디자인 의도에 부합하는 플레이 방식이기도 하다. 정예 퀘스트는 포기하고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는 플레이가 가능하긴 하지만, 높은 난이도에 걸맞은 높은 수준의 보상을 제공하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기는 어려운 편이다. 이후 솔로잉 퀘스트 플레이로는 놓친 보상의 간극을 메울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험치나 재화는 누적으로 복구가 가능하기 때문에, 주로 성능 좋은 장비가 이에 해당한다.
높은 경험치와 재화 수급, 그리고 대체 불가능한 고성능 장비를 얻는 가장 주요한 방법은 자신에게 알맞은 레벨 구간의 인스턴스 던전을 진행하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인스턴스 던전은 해당 레벨에 혼자 진행하는 것이 필드 정예 퀘스트보다 더더욱 불가능하기 때문에 보다 직접적인 파티 플레이의 강제가 발생한다.
필드 정예 퀘스트나 인스턴스 던전을 플레이하지 않고 솔로잉 퀘스트를 진행하는 게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만 디자인 된 레벨링 동선 자체에 이미 던전 플레이가 내포되어 있어, 던전 미진행 상태로는 경험치 구간에 이빠진 상태, 즉 현재 수행 가능한 퀘스트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느릿한 템포와 강도 높은 MMO성으로 인해 리테일과 틀래식은 판이하게 다른 플레이 경험을 갖게 되는데, 여기에 잘 적응할 수 있으면 15년 전 와우가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흥미로운 아제로스 모험을 떠날 수 있는 것이고, 적응에 실패하면 게임 자체를 떠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특징들에 적응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위의 특징들이 갖는 직접적인 단점은 바로 "파티 플레이의 지나친 강제성"이라고 정리해볼 수 있다.
파티를 구한다는 건 일단 내가 필요로 하는 조건에 해당하는 플레이어가 지금 이 순간 이 근처에 있을 거라는 보장을 하기 어렵다는 가장 근본적인 어려움을 갖고 있다. 심지어 그런 조건에 맞는 플레이어가 주변에 있더라도, "전혀 모르는 타인과 운명 공동체로 강하게 묶여 게임을 함께 진행하는 것" 자체에 심리적 거부감을 느끼거나 일단 다른 캐릭터에게 채팅 입력창을 열어 "저기요, 님" 하고 운을 떼는 것부터 어렵게 느끼는 플레이어들도 생각보다 많다.
그런데 위에서 정리한 것처럼, 파티 플레이를 위한 조건 자체가 어려워 파티 플레이를 생략하고 솔로잉을 진행하게 되면, 경험치나 장비의 성장 부분에서 상대적으로 크게 정체되게 되고, 종종 퀘스트 없는 미아 상태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전투 자체가 느릿하고 다운 타임에 딱히 할 일도 없어 게임의 전체적인 인상이 크게 저하되기 마련이다.
이후의 업데이트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와우 개발팀에선 어떤 방법을 취했을까?
바로 "파티 플레이 강제성 완화, 즉 솔로잉 경험 개선"이 향후 십수년간 와우가 흘러온 큰 방향이다.
필드 정예 퀘스트를 필수 요소가 아니도록 동선과 보상을 수정하고, 일부 정예 등급 몬스터들은 일반 등급 몬스터로 난이도를 하향했다.
일반 퀘스트 진행만으로 대부분의 장비 슬롯을 교체 성장시킬 수 있도록 보상을 강화했으며, 성장 레벨 구간의 인스턴스 던전을 진행하지 않아도 이 빠진 구간이 없도록 퀘스트 동선을 촘촘하게 강화했다.
아울러 느릿한 전투 템포를 당겨 쿨다운, 캐스팅 시간을 대폭 단축시켰으며, 대부분의 직업군에서 다운 타임이 발생하지 않도록 전투 시 소모되는 전투 자원의 비율을 완화시켰다.
다른 플레이어와의 인터랙션이 없이 오로지 게임이 제공하는 컨텐츠만 홀로 소비하면서 진행하더라도 덜 지루하도록 게임 진행에 따라 월드가 변화하는 위상 변화 시스템을 넣거나, 주요 서사를 강조하기 위한 캐릭터 스크립트 액팅, 컷씬, 시네마틱의 추가 등과 같은 전반적인 연출 시스템을 대폭적으로 강화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리테일 버전의 와우에서 우리가 느끼는 바로 지금의 플레이 감각이 됐다.
타인이라는 존재는 없어도 딱히 불편하지 않지만, 있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것도 없다.
한 때는 호드와 얼라이언스라는 진영 간의 결투로 RvR을 열심히 풀어내려고 노력했지만, 최근에는 "PvP 비활성화"라는 옵션 하나만 꺼주면 바로 옆에 있는 캐릭터가 적 진영이더라도 무엇 하나 달라지는 게 없다.
뭐.. 굳이 꼽자면 적 진영 캐릭터가 일반 몬스터를 선공하면, 나는 루팅을 못하고 처치 퀘스트를 진행할 수 없다는 정도? (심지어 퀘스트 전용 몬스터나 정예 몬스터는 타 진영 선공이어도 루팅/퀘스트 권한이 있음)
전투 템포도 비약적으로 높아져 한 지역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졌으며, 이동 역시 날탈을 타고 3차원 기동을 하면서 다른 누군가를 만날 기회 자체가 거의 사라졌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MMORPG에서,
MM이 빠지고,
그냥 ORPG가 된 것이다.
이것이 과연 최선의 선택과 결과였을까?
심지어 수많은 와우라이크형 MMORPG들도 선두주자인 와우를 따라 같은 방향으로 개발되어 왔지만, 와우는 장르 모두를 막다른 절벽으로 몰아간 것은 아니었을까?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말이다.
If World
그렇다면 MMORPG에겐 어떤 대안이 있었을까?
개인적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Post-WOW 라는 Next Step을 보여준 작품이 아레나넷에서 개발한 NCSOFT의 길드워 2Guild Wars 2가 아니었을까 싶다.
길드워2는 퀘스트와 인스턴스 던전으로 진행되던 와우의 선형 레벨링 동선을, "필드 퍼블릭 이벤트"라는 방식으로 다르게 접근했다.
퍼블릭 이벤트 방식은 길드워2에서 처음 시도됐던 건 아니기 때문에, 리프트Rift 라는 작품에서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리프트라는 필드 이벤트를 차용한 형태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저마다 같은 동선을 별도의 진도로 진행하게 되는 퀘스트 대신, 필드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실시간 이벤트들에 참여하게 된다. 각 구역마다 해야할 일들이 마치 퀘스트와 크게 다르지 않게 배치되어 있어 고정된 상설 이벤트들을 진행하다보면, 특정 주기로 대규모 인원을 필요로 하는 이벤트가 발생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플레이어들은 이벤트 지역으로 하나 둘 모여들게 된다. 이벤트는 발생하는 시점에 별도의 사전 조건 없이 그 지역에 존재하는 모든 플레이어가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퀘스트 시스템이 갖는 가장 큰 난점인 "플레이어 간 서로 다른 진도"를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같은 지역에 머무는 모든 플레이어는 잠정적으로 같은 이벤트에 참가하게 될 미래의 동료이며, 이벤트 종료와 동시에 다시 흩어지게 될 부담없는 관계가 될 수 있다. 정적인 파티 플레이는 참가도 불편하지만, 이탈 역시 불편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시스템이 알아서 매칭과 분산을 담당해주는 퍼블릭 이벤트 시스템이야말로 진일보한 파티 시스템의 단면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 같은 이벤트 위주의 게임 설계인 Event Driven Design은, 이후 레드5 스튜디오의 MMOFPS, 파이어폴FireFall에서 한층 더 심화된 방식으로 전개해 많은 게이머들과 개발자들에게 영감과 희망을 준 바 있으나, 아쉽게도 그 프로젝트는 현재 서비스가 종료되고 말았기 때문에 직접 체험해보는 건 어렵다. 혹시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를 통해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참고해보면 좋을 것이다.
[GDF] 파이어폴 단편적 소감
마치며
글을 짧게 쓰지 못하는 병이 있어서 글이 과도하게 길어졌지만 전체를 요약해보자면,
와우는 파티 플레이가 심하게 강제되는 걸 문제라고 생각해서 파티 플레이 필요성 자체를 도려내버렸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더 쉽고 가볍게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까?
파티 플레이가 문제라서 파티 플레이를 없앤다니, 마치 학교폭력이 문제이니 학교를 없애면 되겠군!이라는 익숙한 누군가의 사고방식과 닮아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분마저 들게 된다.
오랜 시간 사랑해 온 한 브랜드의 몰락은 팬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꽤나 힘겨운 시간들이다.
부디 지금부터라도 "잃어버리고 있던 바로 그 것"을 되찾고, 와우도, 블리자드도 다시 팬들과 플레이어들에게 재미로 보답해주는 시간이 오길 바란다.